'민중'은 누구일까?
뜬금없는 회의일수도 있지만, 알고보면 꽤 오래된 고민이다.
'민중'은 누구일까? 80년대, 적과 아군이 분명하게 구분되던 시기에는 이런 고민에 대한 답도 명쾌하게 제시되었다.
천만 노동자와 농민, 도시 빈민이 바로 '민중'이었다. 군부독재와 자본가들은 '민중의 적'이었으며 그들은 '한줌도 안되는' 타도해야 할 대상이었다. 단순하고 명쾌한 이분법이었다.
지금은 적과 아군이 분명하게 구분되는가?
노무현을 찍기 위해 민주노동당 지지자들에게 제발 도와달라고 애걸하던 그들은 과연 누구였던가? 한나라당이 집권하면 안 되고, 열우당이 집권해야 한다는 그 논리는 과연 '민중'을 위한 논리였던가?
노무현 정권이 되었어도 노동자의 삶이 조금이라도 나아졌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농민의 삶이 더 좋아졌다는 말도 들어본 적 없다.
이제는 진보의 띠도 묽어져서 극우와 극좌만 제외하면, 우파에서 좌파까지 스펙트럼이 아주 넓게 펼쳐져 있다. 많은 사람들은 그 스펙트럼의 어딘가에 서 있을 것이고.
스스로를 '민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더욱 없다.
'민중'은 좌파 지식인이 규정한 사회적 현상의 이론일 뿐인가?
비정규직 노동자가 늘어나고, 최저 생계비에도 미치지 못하는 극빈 가정이 늘어나고 있지만, 정작 '민중'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한나라당, 조선일보로 대표되는 극우 파시스트 집단을 지지하는 계층이 엄연히, 높은 비율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그리고 극우 파시스트 집단을 지지하는 계층이 모두 기득권자가 아니라는 것, 많은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 극우 파시스트 집단을 지지한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전선이 치열할 때는 적과 아군의 구분도 뚜렷해서 좋았다.
그때는 아군의 결속력도 훨씬 강했다.
하지만, 지금은 모두 뿔뿔히 흩어져버리고, 적당히 시대와 타협하고 뱃살에 낀 기름기와 타협하면서 즉물적인 삶을 사는, 나를 비롯한 80년대 세대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정작 '민중'은 어디에도 없지만, 진정 '민중'은 있다. '민중'은 '사회의 부조리한 모순을 자각하고 실천을 통해 그 모순을 바꾸는' 사람이다. 민중은 더 이상, 노동자, 농민, 도시 빈민이라는 포괄 개념이 아니다.
아무리 자신의 정체성이 노동자, 농민, 도시 빈민이라 해도, 자신이 속한 계급을 자각하지 못한다면 자본의 논리에 휘둘리는 멍청한 '대중'일 뿐이다. '대중'은 멍청하다.
계급 속의 자신을 자각하지 못한 이상, '대중'은 사회의 본질을 꿰뚫는 혜안이 생길 수 없다. 사회의 본질을 알았다면 그는 더 이상 '대중'이 아니므로, '대중'이라는 개념은 무지한 상태의 불특정 다수일 수밖에 없다.
'대중'은 여론의 조작에 쉽게 넘어가며, 권력과 자본에 쉽게 휘둘리는 대상이다. 그들은 개별적인 이익에 따라 자본의 편으로 넘어갔다가 '민중'의 편으로 넘어오기도 하는 기회주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
진보 정당과 노동자 계급을 대표하는 민주노총 같은 단체, 노동자의 계급 이익을 위해 헌신하는 지식인은 이런 '대중'을 계몽하고 교육해야 할 의무가 있다. '대중'의 많은 부분이 바로 노동자들이기 때문이다.
적극적으로 '대중'을 '민중'으로 만들어야 하는 것은 진보 진영의 의무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은 이런 계몽과 교육에 너무도 소홀이 하고 있다.
'대중'은, 그들이 원하지 않았겠지만, 천박한 수준에 머물러 있다.
그것이 바로 자본가들이 원하는 것임을 그들은 모를 것이다. 자본가들은 프롤레타리아들이 천박한 수준에 머물러 있기를 원한다. 단지 공장에서 일할 때 불편하지 않을 만큼의 지식만을 가지고 있고, 사회의 본질에 대해서는 문맹이 되길 바란다.
아주 적은 수입으로 하루 하루 살아가기도 힘겹게 만들고, 긴 시간 노동에 지치게 만들고, 세상의 모순에 눈뜰 시간 조차 없게 만든다.
그나마 조금이라도 시간이 나면 텔레비전, 영화, 술집, 섹스 등 저열한 기호를 찾게 만든다. 끊임없이 개인적인 문제에 매달리도록 가족 이데올로기를 부추기고, 비정치적인 것들, 탈이데올로기, 사소한 일상들에 매몰되도록 유도한다.
'대중'들은 책 사 볼 돈도 없고, 책 읽을 시간도 없고, 책을 읽을 지식도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결국 자포자기하게 된다.
가난과 무지가 '대중'으로 매몰되어 있는 상태를 변명하는 수단이 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역시 변명일 뿐이다. 소극적이고 방어적인 태도로 극우 파시스트 집단을 비난하고, 똑같이 진보 진영도 비난하는 태도는 스스로의 무지를 드러낼 뿐이다.
민중(노동자)으로 살아가면서 매주 로또 복권을 구입하고, 일확천금을 노리고, 파업 투쟁의 현장에서 슬그머니 빠져나와 술이나 마시고, 성인 오락장이나 다니고, 담배도 끊지 못하고, 책은 일년이 지나도 한 권도 읽지 않고, 시간이 나면 텔레비전이나 보는 한심한 태도로는 죽을 때까지 '부속품' 취급이나 당하면서 살아갈 것이다.
민중(노동자)이 착취 당하면서 기계 부속품으로 살아가는 것에 대해 의문을 품지 않는다면, 그 삶은 그저 노예의 삶일 뿐이다. 민중(노동자)이 투쟁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피와 살을 뜯어 먹는 악마의 이빨을 멍청히 바라보고 있는 미물에 지나지 않는다.
과연 그렇게 살고 싶은가?